지난했던 더위가 물러가고 어김없이 찾아온 가을. 계절 맞춤 영화로 멜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을 골랐다. 제목과 포스터가 풍기는 말랑말랑한 감수성이 좀 걸렸지만 여주인공의 미모에 이끌려 그만. 그런데 웬걸? 영화의 만듦새는 기대 이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이 유발하는 외로움과 고독감이 인구 1,300만 대도시에서 두 주인공의 우연한 스침과 필연적인 만남을 예정하고 있었다는, 어쩔 수 없는 작위성과 상투성을 넘어서는 나름 무게 있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럼 저 멀리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사랑 얘기를 들어보자.

굵은 남자 목소리(Martin)의 내레이션과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풍경들이 펼쳐진다. “이 도시의 건물들은 무규칙적이고 무질서하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나란히 서있는 게 꼭 우리의 삶과 같다. 소통 부족과 무관심, 우울증, 스트레스, 강박증, 공황발작 등 현대인의 모든 질환은 이런 건물들과 건축가의 영향이다. (중략) 나는 주 2회 정신과 상담을 받는데 주치의 말로 ‘회복 공포증’이라고 하는, 반복되는 공황발작으로 스스로를 아파트에 가둬버렸고 열일곱 가지 게임의 전문가 레벨에서 우승했다. 의사는 내게 사진 찍기를 추천했는데 도시와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란다.“

▲ 마르틴

▲ 마리아나

뒤이어 여자 목소리(Mariana)가 흘러나온다. “2년 전에 건축사가 됐지만 아직 아무것도 짓지 못했다. 건물도, 집도, 침실도. 난 다른 건물들과도 잘 맞지 않았다. 4년간 같이 살던 사람과 헤어졌다. 잘 해보려고 애썼지만 내 삶이 인생게임이라면 5단계 쯤 되돌리고 싶다...” 거리에 나선 두 사람은 건물에서 개가 떨어지고, 차에 치인 청년이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지나던 노파가 실신하는, 정말 우연한 사고 현장에서 첫 번째 스침.

두 사람이 각자의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고 한 번 우연히 스쳐갔으니 이제 이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다투는지, 그러다 헤어지는지, 아니면 결국 사랑을 완성하는지가 관객들이 기대하는 일반적인 멜로영화의 공식이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도 한참동안 이들은 반복적으로 스쳐 지날 뿐 만남은 요원하다. 영화는 두 사람의 일상을 번갈아 보여주며 내레이션이 계속된다. 감독은 이들 사랑의 필연성을 준비하는데 집중하는 듯하다. 좀 더 보자.

남자는 미국으로 떠난 여자 친구가 두고 간 강아지를 맡기는 개 돌보미, 인터넷으로 만난 여자와 데이트를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소통보다는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거나 작업용 의자를 구입하는 등 혼자 놀기에 빠져있다. 

여자는 헤어진 남자 친구를 떨치지 못하고 직장동료와의 첫 데이트 자리에서 끝내 도망치고, 수영장에서 만난 매력적인 남자와도 하룻밤으로 끝이다. 두 사람 모두 사랑을 갈구하고 있지만 남자는 공황장애로, 여자는 닫힌 마음을 열지 못해 다시 혼자가 된다. 몸서리치게 외롭지만 사랑은 어렵다.

그런데 이들이 사랑을 못하는 이유가 그들만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그것이 통상적인 로맨틱 멜로와 다른 지점이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 건물들의 부조화

▲ '신발장'이라 부르는 원룸 아파트.

영화는 줄곧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건조한 풍경과 두 사람의 내레이션을 통해 대도시의 적막함을 보여준다. 빼곡히 들어찬 건물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끊임없이 울리는 휴대폰 알림 소리,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 사람의 얼굴 대신 마주한 컴퓨터 모니터 화면.... 인간의 욕망과 편리를 위해 만든 문명의 이기들이 관계를 단절시키고, 서로를 구분 짓게 만들며, 감수성을 갉아먹는 도시의 환경이 그들을 그 좁은 공간에 가둬버린 것이다. 이제 영화의 엔딩이 궁금해진다.

결국 두 사람은 건물 옆 벽면(sidewall)에 창을 내고 마음의 벽을 허문다. 표정은 밝아졌고 일상은 한층 여유로워졌다.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영화(우디 앨런의 ‘맨하탄’)를 보고, 드디어 그 창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여자의 말대로 지금까지 건물 옆 벽면은 “전면이나 후면과 달리 쓸모없는 것으로, 푼돈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로또광고, 건물 임대광고, 슈퍼마켓이나 패스트 푸드점까지의 거리안내”로 쓰였는데 이제 두 사람의 심리적 탈출구가 된 것이다.

인터넷 채팅으로 연결된 두 사람. 남자는 여자의 프로필을 묻고, 여자는 남자의 하루를 묻는다. 며칠 후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여자는 뭔가를 발견한다. 평소 ‘월리를 찾아라!’를 통해 갈고 닦은 실력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남자를 발견한다. 운명이다. 폐쇄공포증으로 이용하지 않던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가 거리로 뛰쳐나간다. 드디어 마주 선 두 사람. 남자도 직감한다. 결국 해피엔딩이다.

▲ 마리아나의 쇼윈도우를 바라보는 마르틴

결말은 예상대로 상투적이고 통속적이다. 그래서 감독은 영리하게도 내레이션(Narration)이라는 장치를 이용했다. 이 영화에서 내레이션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첫째, 두 주인공이 자신을 소개하고, 반복 사용으로 캐릭터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둘째, 그들의 일상을 설명하고 내면의 소리를 전달하면서 두 사람의 간극을 좁히기도 하고, 넓히기도 한다. 셋째, 인물들의 외로움과 고독감을 전달하는 정서 환기 역할을 한다. 넷째,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소격효과의 장치로도 이용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의 배경이며, 두 사람이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도시를 설명하면서 멜로 영화의 클리셰(cliché)를 피해가는 장치로 이용된다. 물론 감독이 구상 단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 방식으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무튼 도시와 사랑, 소통, 근원적 외로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효과는 충분했다. 기존 멜로영화들의 감정 과잉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강추. 

※오명수는 디지털 장편 <나비>(2001년. 문승욱 감독. 김호정, 강혜정, 장현성 주연)의 라인 프러듀서를 거쳐 댄스필름 <The Portrait of Times >를 연출했다. 지금은 고향 대전으로 돌아와 유성에서 ‘커피하우스 에이미’를 운영하며 지역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기사출처 : 대전문화타임즈(http://www.dmtimes.co.kr)] 

오명수  hujk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