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주(周)나라의 도가(道家), 노자(老子)는 “천체만물은 본체(本體)에서 생겼는데, 그 본체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어찌 천체만물뿐이랴. 시간도 마찬가지다. 존재를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다만 실체가 없을 뿐이다. 기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니다. 태울 수도 없고, 녹일 수도 없다. 우연일 수도 있고 필연일 수도 있다. 해방일 수도 있고 구속일 수도 있다. 또 영원이어도 되고 순간이어도 된다. 때로는 희망이고 절망이며, 시작이고 끝이 되기도 한다. 싫어도 다가오고, 좋아도 달아난다.
그 이름 시간…. 정체와 의미를 누가 알까. 시간은 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놓을 수도 없다. 오직 잡히는 건 시간이 아닌 시계뿐이다. 너나없이 시간을 말할 때면 모르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떠들어댄다. 그러나 막상 시간의 정체와 의미를 물어올 때면 대답할 길이 없다. 인생이 다 저물어버렸음을 깨닫게 되던 어느 날 나는 잡을 수 없는 시간을 원망하며 어둠속에 시계를 던져보기도 했다. 물론 취기(醉氣)어린 만용이었지만….그러나 시계를 삼켜버린 어둠의 시간은 메아리조차도 되돌려주지 않았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시간 속에서 살다가, 결국은 시간 속으로 죽어간다.
때문에 인간이 누리는 삶과 죽음은 모두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의 정체, 시간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석가가 가르치는 것처럼 돌고 도는 윤회의 동그라미인지, 예수가 가르치는 것처럼 직선의 질주인지, 아니면 힌두교의 설법처럼 나선(螺線)의 바퀴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쉼 없이 스치는 시간의 정체, 시간의 의미를 안다면 우리 삶의 뜻과 보람도 찾아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모 나더냐, 둥글더냐.” 춘향가 사랑타령처럼 시간타령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고뇌의 허공만 맴돌 뿐이다. 누구는 허무라고도 하고, 누구는 무상이라고도 한다.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없어도 있는 것 같다. 시간이 남아돌아 주체 못하는 사람도 있고, 언제나 부족해서 갈구하는 사람도 있다. 연월일(年月日) 시분초(時分秒)로 토막 내어 문명이란 이름으로 세월을 요리하지만, 정작 세월을 장악하고, 시간을 정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가(道家)의 시조 노자도, 유가(儒家)의 시조 공자도, 또 불가(佛家)의 시조 석가도, 그리스도의 시조 예수도, 또 문명을 선도해온 동서고금의 명현석학들도 모두가 시간의 정체와 시간의 의미를 풀어내지 못했다. 생각은 신앙을 지배하고 학문은 문명을 지배하지만, 시간은 생각도 학문도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가장 소중한 것을 고르라면 누구도 거침없이 시간일 것이다. 또 하나만 붙잡으라면 시간의 정체, 하나만 알라면 시간의 뜻, 하나만 이루라면 시간의 보람일 것이다. 영원도 순간도 시간의 정체다. 장수 단명(長壽 短命)도 시간의 뜻이다. 성공과 성취도 시간 속에서 빛나는 삶의 보람이다. 비록 소망은 서로 달라도 공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의 수명도 시간이다. 그림자마저 소멸하는 어둠 속에서도 시간은 정지함이 없다. 불가능 없는 나폴레옹의 무소불위 권력도, 진시황을 휘어잡은 절세가인 양귀비의 미색도, 부귀영화 부러울 것 없던 솔로몬의 지혜도, 독재세습 권력으로 국민을 도탄 속에 짓밟던 북한의 김정일도 어느 날 시간 속에 사라졌다.
흥망성쇠로 부침해온 모든 역사도 시간을 초월할 수는 없었다. 행복과 불행, 또 밤과 낮이 모두 시간 속에서 반복한다는 사실은 어렴풋하지만, 그 본체인 시간이 어디서 오고, 또 어디로 가는지 향방을 밝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계는 객관의 시간을 나타낼 뿐 주관의 시간을 가르쳐 주지는 못한다. 다만 탄생은 시작이고, 죽음은 끝이라는 막연함뿐…. 때문에 시간은 공평하다. 누구도 단한번의 삶뿐이다. 시간의 정체와 의미, 알아 무엇 하랴.
류인석(본회 회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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