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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 게리 쿠퍼와 헤밍웨이, 타계 60년20C 최고인기배우·작가, 미남·바람둥이

왕년의 명배우 게리 쿠퍼와 노벨상수상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비슷한 데가 많고, 상당한 미남으로 생전에 아주 친했다고 한다. 엄청난 인기에다 바람둥이였고, 여복(女福)이 많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쿠퍼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2번이나 탔고,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노벨상과 퓰리처상을 받았다. 둘은 젊을 적 내가 좋아했던 배우요, 작가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올해는 20C 헐리웃 불세출의 배우였던 게리 쿠퍼(1901년-1961)가 세상을 뜬지 꼭 60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쿠퍼의 절친인 20세기 미국 최고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년-1961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해이기도 하다. 1961년 5월7일 쿠퍼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불과 2개월도 안 된 7월2일 그의 저택에서 헤밍웨이도 엽총자살을 했다.

그해는 내가 고교 3년 재학 중일 때이다. 그렇게도 좋아했던 두 명의 스타를 동시에 잃은 나는 그야말로 멘붕상태이었다. 특히 게리 쿠퍼가 죽은 5월 7일 나는 학교에 가서도 하루 종일 말없이 입을 다문 채 쿠퍼를 추모했다. 친구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미국 배우 한 명 죽었다고 그리 심각하냐?”며 비웃었지만, 나는 슬픈 채로 하루를 보내야했다.

쿠퍼는 나의 우상이자 가장 존경했던 헐리웃 남자배우였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알고 보니 침묵으로 추모한 나는 약과였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1937년-)의 글을 보니 쿠퍼가 죽은 날 그녀는 학교도 안 가고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분명 나보다 한 수 위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나는 헐리웃 스타로서 쿠퍼만한 남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오늘날의 젊은 영화팬들은 그의 이름조차 생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당시 미국 영화 팬들의 우상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나 최근까지도 미국대통령에 당선되어 백악관에 들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그가 출연한 명화 ‘하이 눈’((1952년)을 관람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혼자 불의와 맞서 싸우는 캐릭터를 대통령마음속에 다지기 위함일 것이다.

191cm의 큰 키에 잘 생긴 미남형의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1942년 요크상사 1953년 하이 눈)이나 수상했다. 나는 그가 젊었을 적보다 40-50대일 때 더욱 큰 매력을 느꼈다. 하이 눈을 비롯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년) 교수목(1959년) 하오의 연정(1957년) 우정 있는 설복((1956년) 베라크루즈(1954년) 등 히트작 대부분이 그렇다.

왜 내가 쿠퍼를 좋아했을까? 그것은 미국인이 그를 좋아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과묵과 정의로 상징되는 그의 캐릭터에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약간 마른 모습에 나직한 목소리, 권총을 재빠르게 뽑는(0.4초) 솜씨는 어린 나를 매혹의 늪에 빠져들게 했다. 그는 항상 악을 응징하고 정의의 편에서 약자를 보호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역을 맡았다.

그러나 잘 생긴 외모만큼이나 스캔들도 무성했다. 마천루(1949년)에서 공연한 25세 연하 패트리시아 닐(1926년-2010년)과는 임신까지 하는 불륜을 저질렀다. 그녀는 더스틴 호프만과 공연한 졸업(1967년)에서 딸의 연인을 유혹하는 역할을 했다. 반면 오드리 헵번과 공연한 ‘하오의 연정’(1957년)에서는 키스신을 여러 번 NG내 촬영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그는 ‘여성을 유혹하는데 단 세 마디면’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바람둥이는 틀림없었던 모양이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사석에서 쿠퍼를 가리키며 “제가 만약 대통령선거를 치를 때 이 친구가 나왔으면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잘 생긴 친구는 처음 봤다“고 말했다. 특히 그의 웃음이 백만 불짜리라고 칭송했다.

게리 쿠퍼보다 두 살 위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문단의 긍지요, 자존심이다. 토론토지 기자로 글쓰기를 시작한 그는 1차 대전 때 종군기자로 참전했다 귀국한 후 22살 때 파리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며 소설을 썼다. 당시 파리에서는 피카소 제임스 조이스 스콧 피츠제럴드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브뉴엘 등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그는 전형적인 마초기질(남자다움을 지나치게 강조하는)의 소유자였다. 낚시와 사냥, 권투 등을 두루 좋아했고 투우를 즐겼다. 1,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직접 뛰어들어 체험문학을 실천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1929년)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1926년) 킬리만자로의 눈(1936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년) 노인과 바다(1952년)등을 썼다.

그는 꾸밈을 최대한 배제하고 간결한 문체와 사실적이고 거친 묘사, 그리고 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술방식으로 하드보일드문학의 대표작가로 일컬어졌다. 잘 생긴 외모와 다부진 체격으로 남성성의 상징과 함께 수많은 스캔들을 양산했다. 그는 정식으로 4번의 이혼과 4번의 결혼을 했다. 그는 허풍에 가까운 과장과 거짓말도 많이 했다.

미국 남쪽 끝 플로리다의 키웨스트 섬에서는 매년 헤밍웨이 닮은꼴 선발대회가 열린다. 헤밍웨이의 상징인 하얀 턱수염과 사냥복을 입은 수많은 후보자들이 경연한다. 이곳은 그가 1930년대 10년 간 살았던 곳이다. 이와 함께 스페인의 팜플로나에서 매년 열리는 ‘소몰이 축제’도 함께 열린다. 나는 몇 해 전 팜플로나를 찾아 그가 즐겨 찾던 카페를 방문했다.

나는 영화화된 그의 작품 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무기여 잘 있거라를 으뜸으로 친다. 또 킬리만자로의 눈, 노인과 바다도 좋다. 그는 ‘누구를...’를 영화화할 때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을 캐스팅 할 것을 강력 제안해 성사시켰다. 나는 그가 피카소, 만 레이 등과 함께 실명으로 등장하는 우디 앨런의 ‘미드나이트 인 파리’를 아주 재미있게 봤다.

영화화된 작품의 주인공들은 게리 쿠퍼를 비롯해 타이론 파워 그레고리 펙 록 허드슨 등 모두가 당대 최고의 미남스타들이다. 둘은 전성기시절 헐리웃의 에바 가드너 등 유명 여배우들과 함께 자주 쿠바로 건너가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지병에 더 이상 좋은 작품을 쓸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나머지 자택에서 사냥총으로 목숨을 끊는다. 

 

권오덕(수필가 한국문학시대)전 대전일보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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