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한 이념충돌 희생자

필자는 지난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12일 간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반도 9개국을 다녀왔다. 이번에 돌아본 9개국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이다. 그리스는 일찍이 지난 1996년에 관광했다. 준선진국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역시 수년 전 동유럽여행 때 가보았다. 발칸은 50만5000평방km의 좁지 않은 땅이다.

이곳을 하루 8시간 안팎씩 버스타고 다니는 게 쉽지 않았다. 도로사정이 안 좋은데다 국경통과도 까다로웠다. 120km거리가 차로 2시간 이상 걸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을 택한 것은 유럽을 거의 다 보아 갈 데가 별로 없는데다 발칸의 빼어난 유적과 자연경관을 보고 싶었기 때문. 또한 올해 종전 100주년을 맞은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과 보스니아 내전현장을 살펴보고 싶은 호기심에서다.

발칸 여행

발칸 서북쪽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와 남 알프스의 석회암 봉우리가 숱하게 이어지는 산세는 무척 수려했다. 터널과 다리가 거의 없이 계곡아래 펼쳐지는 수많은 호수는 여행객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발칸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으로 ‘유럽의 화약고’로 불린다. 40년 가까이 유고연방을 이끌어 왔던 조지프 티토가 죽은 후 6개 연방이 각기 독립을 선언하는 과정에서 참혹한 인종청소가 자행됐다.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여행 트랜드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 있다. 역사적 비극 및 재난의 현장을 찾아 자기성찰과 교훈을 얻는 여행이다. 대표적인 게 아우슈비츠와 발칸분쟁, 캄보디아 킬링필드이다. 나는 오래 전 아우슈비츠수용소와 캄보디아 대량학살센터, 발칸여행을 통해 인간이 인간에 의해 수십만, 수백만 명이 대량학살 당한 현장을 보고 “인간이 저렇게 잔악할 수가 있는가?”치를 떨었다.

발칸분쟁·아우슈비츠·킬링필드 등 다크투어 최근 인기몰이

발칸국가들은 13C무렵 슬라브족과 게르만족이 북쪽에서 내려와 곳곳에 작은 나라를 만들어 산 게 그 기원이다. 그 후 오스만 투르크 등 외세의 침략을 숱하게 받았고 강제이주로 문화, 언어,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왔다. 발칸은 “유럽의 화약고”라는 별칭과 함께 ‘1,2,3,4,5,6의 나라’로 불린다. 1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티토에 의해 6개국이 통합됨으로써 유고연방 한나라가 되었음을 뜻 한다

2는 2개의 언어(슬라브어 게르만어), 3은 가톨릭, 동방정교, 이슬람 등 3개의 종교, 4는 슬라브, 세르비아, 이슬람, 게르만 등 4개의 민족, 5는 유고연방이 붕괴되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연합, 마케도니아 등 5개국으로 쪼개졌음을 뜻하고 있다. 6은 발칸국가들이 헝가리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6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음을 뜻한다.

유고연방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외교를 잘 해 두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아 정치 경제적 안정을 누렸다. 유고는 1953년 자체적으로 자동차(유고)를 제작했다. 우리의 포니보다 무려 20년 앞섰지만, 지금은 동독의 국민차 트라반트처럼 싸구려 차의 대명사로 다이하드 같은 액션영화에서 파손되는 차량으로 나온다. 1991년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가장 잘 사는 나라다.

이 두 나라는 1인당 GDP가 2만 달러 전후로 유이한 가톨릭국가로 국가기반시설이 서유럽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선진국인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은 영향이 큰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나머지 국가는 5천-8천 달러 안팎으로 유럽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들이다. 티토의 유고연방시절 공산국가 중 가장 잘살던 나라들이 빈국으로 전락한 이유는 40-50년간 지속돼온 공산주의 여파 때문이다.

슬로베니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포스토이나 동굴, 남알프스의 진주라는 블레드 성과 호수가 유명하고, 크로아티아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이 전 세계적으로 이름 나 있다. 나는 몇 해 전 이곳을 가보았는데 두 번째 본 탓인지 감흥은 그때만 못했다. 크로아티아는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이름 난 것과 볼거리가 풍부해 관광대국의 면모를 지녔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다시 오고 싶은 나라다.

아드리아 해 서쪽에 있는 자다르는 조그만 도시지만 볼게 많다. 아름다운 해안과 함께 오래된 성당 박물관이 여럿 있다. 그러나 최고 명물은 지난 2005년 설치 예술가 니콜라 바시치가 만든 바다 오르간이다. 바닷 밑에 35개의 파이프를 설치해 파도의 세기와 높낮이에 따라 각기 다른 악기 소리를 낸다. 들어보니 마치 고래 소리와 비슷하다. 이 설치아이디어로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고 한다.

안성기 커피광고 배경 두브로보니크는 아드리아해 진주

크로아티아 최대 볼거리는 두브로브니크이다. 이 도시는 아드리아의 중심도시로 한때는 베네치아와 어깨를 겨루기도 했다. 수도 자그레브에서 이곳에 가려면 반드시 보스니아 땅 20km를 거쳐야 한다. 본토와 떨어져 남의 땅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 빨간 지붕과 파란 아드리아 해,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에 대해 노벨상수상 작가 조지 버나드쇼는 “지상낙원을 보려면 두브로브니크로 오라”고 했다.

시인 바이런도 이곳을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고 했다. 나는 인근 스르지 산에 올라 이 아름다운 도시를 조망한 후 배를 타고 40분 간 앞섬을 한 바퀴 돌아봤다. 배에서 내린 다음 성곽 위를 30분 간 걸으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20여 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의 미켈란젤로언덕에 올라 붉은 기와지붕이 깔린 피렌체 시가를 볼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서 촬영한 안성기와 고현정의 커피광고가 생각났다.

크로아티아가 세계 최초로 발명한 것은 적지 않다. 낙하산, 만년필, 넥타이, 수력발전소 등이다. 그 중 넥타이는 17C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힘겹게 승리한 후 프랑스주축 동맹국들 자축연에 참석한 크로아티아병사들이 맨 장방형의 천 조각에서 비롯됐다. 군인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아내나 애인들이 부적처럼 목에 걸어준 것이 시초가 됐다. 이것을 루이 14세가 목에 걸면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는 스포츠강국으로 2018 러시아 월드컵축구에서 준우승을 한 축구 강국이다. 세계에서 패션모델을 가장 많이 배출한 미녀국가이기도 하다. 크로아티아는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와 독일 편으로 전쟁에 참여해 보스니아민족을 많이 학살했다. 그러나 1991년 독립선언 후 세르비아가 침략해 자국 내 세르비아계 군인들에 의해 집단 학살을 당하는 곤욕을 겪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됐다.

발칸이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면 보스니아는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중 모자이크’이다. 사회주의 유고연방이 해체의 길을 걸으며 그간 억눌려왔던 민족감정과 종교분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보스니아는 가톨릭, 정교, 이슬람 세 종교가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 분쟁의 씨를 안고 있었다. 보스니아는 정교도들에 의한 무슬림학살, 크로아티아에서는 다수 가톨릭교도들에 의한 정교도학살이 행해졌다.

또 코소보에선 소수 정교도들에 의한 알바니아 무슬림학살이 자행됐다. 여기에 티토가 죽은 후 大세르비아민족주의의 야욕에 불탔던 세르비아 학살 3인방 밀로셰비치와 믈라디치, 카라지치가 인종청소를 벌여 보스니아내전에서 25만 명, 유엔안전지대 선포지역 스레브레니차에서 8천명의 알바니아 이슬람 계 주민들이 학살됐다. 또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됐다. 이들 3인은 체포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라예보는 1차 대전발발·한국세계탁구우승·대량학살현장

그 중 밀로셰비치는 지난 2006년 옥사했다. 나는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며 감회에 젖었다. 1973년 4월10일 세계여자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주축으로 한 한국 대표 팀이 중국·일본을 꺾고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던 곳이다. 필자의 감회는 더욱 남다르다. 한국 팀이 개선해 카퍼레이드 할 때 이에리사 차에 올라타 단독인터뷰로 특종을 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사라예보를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내 소원을 이룬 것이다. 또 하나는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지역이어서 꼭 가보고 싶었다. 실제로 2010년도에 세계인이 꼭 가보고 싶은 도시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부부가 이곳 라틴다리에서 세르비아청년의 총에 맞아 숨진 것. 우리는 1차 대전의 도화선이 된 이 비극의 라틴다리를 건너 다리 너머 설치된 당시의 사건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사라예보는 가톨릭과 동방정교, 이슬람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사라예보를 발칸반도의 예루살렘이라 부른다. 구시가지 곳곳에서 가톨릭성당과 정교회예배당, 이슬람모스크, 그리고 유대인 예배당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 많았다. 무슬림의 기도소리를 알리는 아잔소리, 성당의 짧은 종소리, 정교회의 긴 종소리가 시간을 교차해 울리고 있었다. 2년 전 가본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와 꼭 닮았다고 할까?

종교구성은 이슬람 40%, 가톨릭 22%, 정교 38%다. 정부형태는 공화정으로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가 각각 1명씩 3명의 대통령을 뽑아 8개월씩 집권한다. 마침 여행할 때가 대통령 선거 며칠 전이어서 벽보가 나붙는 등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마 대통령이 3명 있는 나라는 보스니아가 세계에서 유일 할 것이다. 얼마나 인종과 종교의 벽이 깊으면 그럴까 생각해본다.

4개의 종교들이 다툼 없이 서로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기이하게 보였다. 어찌하여 사라예보가 비극의 현장이 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평화롭게 보였다. 오밀조밀한 구시가지 상점들은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사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나도 초중학교 다니는 손자 손녀들의 티셔츠와 함께 내전 때 사용한 총알로 만든 볼펜, 그리고 사라예보가 쓰인 파란 내 운동모자를 샀다.

1992년 5월26일 오전 10시경 사라예보 한 빵집 앞에 포탄이 떨어지고 줄서 있던 무고한 시민 22명이 사망했다. 35세의 젊은 첼리스트 스마일로비치는 그날 이후 매일 오후 4시 정각 연주 복을 입고 포탄으로 폐허가 된 현장에서 슬프디 슬픈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했다. 그런 가운데 파편은 튀었지만 인간존엄과 평화를 위한 연주는 계속됐다. 그의 감동적 연주는 금세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발칸·한반도 유사점 많아 북의 핵 폐기 믿어선 안 돼

포성은 멈췄고, 2008년 캐나다작가는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한 영국작곡가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무반주첼로조곡을 작곡했다. 나는 2시간 걸려 헤르체고비나 옛 수도 모스타르로 향했다. 1566년 네레트바 강위에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 돌다리 스타리 모스트를 건넜다. 보스니아내전 때 파괴됐지만 2004년 7월 유네스코에 의해 복원될 때 클린톤과 찰스황태자 등이 다녀갔다.

우리는 성모 발현지 메주고리예에 이어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차례로 돌아보고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발칸반도가 한반도와 매우 유사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됐다. 발칸은 위로 유럽대륙의 강자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아래로 유럽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오스만 투르크가 있다. 그 아래로는 중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이슬람국가들이 있다.

한편 한반도는 사회주의 종주국 러시아와 최근 G2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아래쪽으로는 36년 간 우리를 지배해온 강대국 일본과 태평양 너머 미국이 있다. 발칸반도는 기독교세력과 이슬람세력이 맞붙은 종교전쟁·문명충돌의 희생양이었고 한반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는 이념충돌의 장이 펼쳐져 왔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지역과 냉전의 마지막 화약고인 한반도는 그래서 유사한 점이 많다.

1990년대 초중반 3년 8개월 간 보스니아 인구의 10%가 학살당했고 인구의 반 이상이 제 땅에서 쫓겨났다. 아직도 수많은 보스니아 인들이 해외를 전전하고 있다. 한반도 역시 6,25전쟁 때 수백만 명이 죽고 찾지 못한 시신도 많다. 지금 한반도는 남북대화와 교류가 한창이다. 그러나 낙관은 이르다. 북한의 핵 폐기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끝까지 국가안보를 지킬 때다.

권오덕 전 대전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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