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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홍례문 헐고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전재홍 사진이야기③

김영삼 정부 때 철거…일제 상징건물 사라져

일본제국은 경복궁 홍례문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앉혔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경복궁에 신축, 1926년 1월 준공되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미군정청이 총독부 청사와 관사를 인계했고 3년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해 정부청사로 사용했다. 김영삼정부 시절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단순, 무지한 이유로 철거해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항공촬영으로 본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청사. 4층 규모의 높고 큰 덩치로 신축된 총독부 청사가 조선의 정궁, 경복궁을 가린 장면이 식민지의 상황을 대변해준다.

총독부 신청사는 그 시기 일본 본토와 식민지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고 동양 최대 근대기 서양식 건축물이었다. 지상4층 9600평 규모였고 외부를 화강석으로 마감한 뒤 돔을 중앙탑에 얹었다. 조선은행, 철도호텔에 이어 조선에서 3번째로 9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최첨단이었다.

국내산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건축된 조선은행경성지점. 실내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최첨단 건물이었다.

낙산의 화강석과 전국에서 채취한 대리석으로 건축된 조선철도호텔.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운영했다.

조선총독부는 신청사가 준공되기 이전, 남산에 1907년 건축된 통감부청사를 한일병합이후 사용했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 부지는 현 서울시청자리와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자리, 2곳으로 예정되었었다. 초대총독 데라우치는 예정지를 마다하고 경복궁 홍례문 구역으로 정했다. 이는 조선의 정궁을 없애고 그곳에 무거운 석조건물을 건축해, 짓밟고 통치하는 상징적인 행위인 것이었다.

 

남산 중턱의 통감부 청사. 한일병합이후 조선총독부가 청사로 사용하다가 경복궁 신청사가 준공되며 이전한다.

경복궁 홍례문 구역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13일까지 33일에 걸쳐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박람회) 행사장으로 철거되어 공지로 있었다. 청사 기초설계는 독일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1912년에 착수했는데 2년 뒤 사망 전까지 마무리를 하였다. 이후 일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와 구니에다 히로시가 설계를 완성했다. 청사 건축은 총독부 직영체제로 진행했고, 1차 공사는 오쿠라구미(大倉組), 2차 공사는 시미즈구미(淸水組) 경성출장소가 맡았다.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 2차 공사를 맡은 시미즈구미(淸水組) 경성출장소. 낙산의 화강암 채석작업을 맡아했다.

초기의 청사 건축기간은 5년, 예산 300만엔으로 잡았으나 각각 10년, 675만엔으로 늘어났다. 조선인 건축가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 박길룡과 이훈우가 참여했다. 고용직으로 이규상 김득린 손형순 박동린 등이 참여했다. 공사에 조선인 노동자 연인원 2백만명이 투입되었고 중국인 석공300명이 참여했다.

총독부 외장과 내장을 장식한 화강석과 대리석은 조선의 각 지역에서 채취해 조달했다. 지근거리 서울 낙산(현 창신동)에서 채취한 화강암은 은은한 광택이 매력이었다. 채석작업은 청사 건축에 참여한 시미즈구미(淸水組)가 했다. 낙산의 화강석은 경성부청, 조선신사, 석조전, 조선은행에도 사용되었다.

대리석도 전국 9곳 지역에서 채취했다. 경기도 양평군 운악면 돌은 뱀피 문양, 황해도 금천군 고동면 돌은 엷은 구름문양, 평안도 순천군 자산면 돌은 팥보라색을 띠어 지역마다 특징이 있었다. 북한에서 채취한 대리석은 서해-한강-용산포구로 운반되었다. 여기서 총독부가 경성전기에 요청해 공사현장까지 깔아 놓은 전차 지선을 따라 현장까지 쉽게 운반했다.<세로 사진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 1차 공사를 맡은 오쿠라구미(大倉組) 사무실과 직원들>

지상4층 규모의 콘크리트와 석재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소나무 약 9400개를 기초로 박고 있는 총독부청사 건설현장.

소나무로 기초를 한뒤 콘크리트 구조가 세워지고 있다. 자갈과 모래는 한강에서 채취해 조달했다.

벽돌은 마포에 있던 관립연와제작소에서 조달했고, 골조에 사용되는 모래와 자갈은 한강에서 채취했다. 이렇게 콘크리트와 석재로 건축된 청사의 총 하중은 약 10만톤으로 추산했다.

이 무게를 받치기 위해 신의주 영림창이 백두산 일대에서 벌목한 소나무를 기초로 사용했다. 소나무 1개당 15톤의 하중을 감당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1만개를 계획했으나 실제 9388개가 항타작업에 사용되었다.

<인물사진은 초대총독 데라우치. 조선의 정궁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을 결정한 인물이다>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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