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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개발보다 보존이 무조건 옳다”[김세영 특종 수난기] ‘공주가 훼손되고 있다’

1971년 7월 5일 C일보 대전주재기자라는 신분으로 공주 무령왕릉 발굴이라는 대형 유적지 발굴사건에 참여했을 때다.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나는 이 사건을 치렀다. 당시 지방행정관서 십여 년의 출입경험은 있었지만 고고학적 전문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국내 크고 작은 보도기관들이 좁은 공주 시내를 북적댔다. 매일 호외가 쏟아지며 취재경쟁에 불을 당겼다.

대형 유적 발굴에 공주가 북적 북적

조간 H일보는 투숙하고 있던 여관에서 사진장비를 몽땅 도난당하는 일도 겪었다. 이 신문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 탁본을 호외로 뿌려 장안을 달구었다. 다음 날 또 하나의 조간 C일보는 당시 공주박물관 창고에 임시 보관 중이던 발굴유물들을 밤새 사진을 찍어 호외 맞불을 놓았다. 당시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은 왕관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시외버스를 탔다. 청와대로 박정희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무령왕릉

7월 장맛비 속에 사흘 만에 대형 발굴조사를 마친 김원룡 박사는 그 후 졸속 발굴을 크게 후회하는 글을 남겼다. 무령왕릉 발굴 후 얼마 안 되어 일본에서는 다카마쓰(高松) 고분이 발견됐다. 졸속 발굴된 무령왕릉 때문이었는지 일본 고고학계는 고분에 내시경을 들이밀고 내부를 훑어 본 후 발굴을 뒤로 미루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좀 더 과학 장비가 나올 때까지 조사를 뒤로 미루었다는 얘기다.

무령왕릉이 발굴되고 있는 송산리 고분군에는 밤늦게까지 구경꾼과 보도진 그리고 현장 조사요원들이 뒤섞여 며칠 밤을 새우다 시피 했다.

나는 발굴단장이 발표하는 내용은 본사에서 온 기자에게 맡기고 주변 관련기사가 있는지 찾아 다녔다. 그러나 고고학 관련 책 한권 읽어보지도 못한 기자에게 관련 기사가 보일리가 없었다. 관내에서 발생한 대형 고고학 관련 발굴사건은 이렇게 해서 막을 내렸다. 주변만 돌다 끝이 난 셈이었다.

충남지사 소개…일본 아스카 문화 살펴 봐

그로부터 7년 뒤 1978년 같은 신분으로 일본 아스카(飛鳥)지방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선진지 시찰의 일환으로 화물선을 타고 동남아를 순회하는 공식 출장 이었다. 나는 출장 목적은 대강으로 끝내고 귀로에 일본의 고도 아스카를 방문 사흘 동안 민박을 했다. 도대체 백제문화가 어떤 모습으로 아스카에 정착했는가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아스카는 충남 부여군과 자매결연을 맺은 마을이었다. 출국 전 나는 당시 충남지사로부터 소개장을 받아 아스카 촌장에게 전해주었다. 아스카 촌장은 직원 한 사람을 나에게 배정하고 취재에 동반케 해 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비조사(飛鳥寺) 동대사(東大寺) 등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 때 느낀 것은 ‘내가 제대로 백제역사공부를 했더라면 좀 더 깊이 느끼고, 깨달았을 텐데...’ 하는 자괴감 뿐 이었다. 귀로에 관련서적 십여 권을 사 들고 왔다. 나는 그 책들 속에서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던 일본사에서의 백제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대충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부터 다시 1년여 뒤 79년 7월26일자 C일보 사회면에는 `백제고도 공주가 훼손되고 있다`는 기사가 나의 이름으로 나와 있었다. 당시 내 눈에 뜨인 공주는 그 후 산업화 과정에서 훼손되기 일보 직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 발굴조사팀이 현장에서 매장문화재를 계속 발굴해내는 현장은 바로 대형 조폐공장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곳이었다.

매장문화재 옆 조폐 공장 시설 논란 들끓어

당시 현지 출신 국회의원 J의원이 출신 고장에 산업시설을 추진했던 것이다.  발굴조사 팀 단장을 맡았던 고 안승주 교수는 백제의 고도의 모습이 밝혀지기도 전에 공장이 들어서는 문제에 대해 심히 우려하는 얘기를 나에게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충남에는 백제의 고도가 두 군데나 있는 지역이어서 고고학계의 잠재적 주요 조사대상 지역 이었던 것이다.

나는 일본 아스카촌방문길에서 일본의 고도보호법이 태동한 역사적 교훈에 감동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 공주와 부여 등 백제고도의 관리 상태가 어떤 모습으로 가고 있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당시 공주는 무령왕릉 발굴 이후 이지역의 매장 문화유적에 관심이 증폭되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조폐공장이 들어설 지역은 지표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사흘이 멀다 하고 그곳에서 또 무엇이 나오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공주사대 발굴 팀은 백제시대의 옹관 묘 등 매장문화제들을 계속 발굴해 냈다. 나는 부지런히 기사를 송고했으나 손바닥만도 못한 지방판 처리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날 나는 발굴현장을 사진 찍고 기사를 만들어 직접 본사를 방문했다. 평소 우편으로 발송하던 관례를 무시하고 기사를 들고 본사를 방문한 나에게 당시 사회부 C모 부장(후에 모당 대표가 됐다)은 별로 관심 없다는 듯이 기사를 그냥 놓고 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적지 아니 실망한 나는 의욕을 상실한 채 근무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흥분하고 말았다. 본사에 두고 온 기사가 사회면 톱으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 7월26일자 조간 C 일보 가 그것이었다.

공주가 발칵 뒤집혔다. 당시 민간단체였던 공주 개발위원회가 반발해 기사가 개재된 신문 불매 운동을 벌이는가하면, 공주시가지가 거의 철시를 한 가운데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 공주지국과 나의 인터뷰에 응한 A교수 집 장광을 부수는 불상사가 터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처럼 개발이 약속된 산업시설이 무산되기 때문이었다. 실로 개발과 보존의 충돌이었다. 본사에서도 뜻밖의 사태에 당황해, 취재기자인 나에게 공주개발위원회에 출석 상황을 설명하라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지시를 내렸다.

성난 군중들 고성…“빨리 현장 떠나라”

나는 당시 부여경찰서장에게 이만저만한 일로 개발위에 사정설명을 하러가니 신변보호를 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현장을 방문했다. 현장의 분위기는 사뭇 살벌하기 조차했다. 주민들은 다행히 나의 얼굴을 알지 못 했으나 위원장이었던  K 씨는  나를 알아보고 놀라는 빛으로 빨리 현장을 떠나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 공산성

해당 기사는 본사 심사위원회의에서도 갑론을박 하다가 고 L모 논설위원장이 “공주 이인지국이 폐국이 된다 해도 기사주장이 옳다”는 판단을 내려 겨우 종결되었다. 또 도하 각 신문에서도 사설을 통해 일제히 나의 특종을 인정하는 글을 실어 사태가 가까스로 진정 됐다.

이 때문이었는지 나는 다음해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자명단에 올라 강제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나는 전두환 정권 말기에 다시 복직된 유일한 기자가 되었지만 나의 해직이 이 기사와 무관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을 오늘날까지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도하 각 신문들이 일제히 사설을 통해 보존 쪽에 무게를 두는 기사를 썼다는 것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됐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발과 보존의 충돌을 지적한 기사였기 때문이다.

얼마 후 전문에 의하면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었다고 들었다. 당시 내무부와 재무부 간에 결론을 내지 못하자 청와대로 넘어가 결정을 유보했다고 들었다. 최종적으로 박정희대통령이 장소를 옮기도록 지시하여 조폐공장의 공주건설이 무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도하 각 신문들이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부각시킨 것도 주요 결정 요인이 되었다.

역사유적의 보존과 개발의 상충은 우리나라만의 과제가 아니다. 일본은 물론 유럽에서도 이 문제로 인한 갑론을박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로마의 자랑거리인 콜로세움 주변에는 고층건물이 들어서 고대의 건축물과 현대의 건축물이 공존하고 있다. 이에 반해 파리의 구도심(중세도시)은 아예 보존 쪽으로 철저히 규제되어있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개발과 보존’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문화재 원형 복원 외에는 개발 삼가야

최근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는 백제의 상징인 공주산성 일부가 무너져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마쳤다. 공산성은 공주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공주를 상징하고 있다. 만일 재정이 허락해 공주는 공산성 주변을 대대적으로 개발 백제 촌을 조성하고 그곳에 백제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각종 콘텐츠를 망라한다면 큰 성과를 거둘 것이다. 이와 함께 공산성내 궁궐터에 궁궐을 재건하고 외국 사신들이 머물던 시설들을 복원 관광객들의 숙소로 활용한다면 성공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최근 공주시는 이와 같은 취지로 공산성 아래 공주백제의 재현을 계획하고 추진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구상이 즉흥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무령왕릉 주변 조폐공장을 착공 하던 때의 생각으로 문화재를 건드려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30여 년 전 백제고도의 주변 개발이 그냥 이뤄졌다면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든 조폐공장을 철거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일본의 고도보호법은 아스카 촌의 냇물 비조천(飛鳥川)을 보호하기로 하고 비조천의 형질변경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우리도 공주산성 주변만이라도 원형 복원에 주안점을 두고 옛 모습을 살려, 아름답고

   
 
개성 있는 역사고도의 특징을 되찾기를 기대해 본다

김세영 전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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