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을 며칠 전에 보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흩어져 살던 가족들과 만나 조상을 그리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추석 땐 무엇보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한동안 소원했던 부모님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추모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잊었던 효도를 되살려 깊이 생각해 보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연례행사이긴 하지만 나도 추석 즈음 돌아가신 부모님을 모신 고향을 찾아 성묘를 하고 집에선 차례도 지냈다. 부모님의 영정을 보며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할 때면 “살아계실 때 좀 더 잘해 드릴 걸”하고 울컥하는 심정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불릴 정도로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을 숭상해 왔다. 노인의 풍부한 경륜에서 오는 원숙한 지혜를 높이 샀으며 웃어른을 존경하고 섬기는 미풍양속을 이어왔다. 아름다운 경로효친의 전통이 우리 사회를 훈훈하고 따뜻하게 했으며 인정이 넘치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같은 경로효친의 풍조는 점차 빛을 바래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됐다.

추석명절을 맞고도 외롭고 가난한 가운데 쓸쓸하게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들 중엔 자녀가 있든 없든 홀로 사는 노인이나 복지시설에 입원해 있으면서 찾아주는 자식도 찾아 갈만한 가족도 없는 노인들도 있을 것이다. 명절 때엔 더욱 외로움을 느끼는 노인들이 많이 있겠지만 평소에도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부모를 폭행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자식들이 여럿이라도 서로 부모 모시기를 미루며 반목하는 형제들도 있다. 심지어는 모시기가 싫다고 부모를 유기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존속을 살해하는 사례까지 있는 세상이 돼 버렸다. 이 같은 사례들은 극히 우발적이고 예외적인 일부 패륜아의 소행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노인의 절반 정도가 첫 번째로 경제적 어려움을 꼽았으며 그 다음이 건강문제, 그 다음이 외로움과 소외감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노인들이 존경을 받기는커녕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존재로 천대를 받아가면서 불우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는 얘기다. 경노 효친을 제일의 덕목으로 삼아온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노인인구 비율이 급격하게 늘어가는 추세에서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게 될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같은 사태가 빚어진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큰 흐름으로 보면 근래 서구문명이 밀어닥치면서 비롯됐다고 볼만하다. 이후 우리의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농촌이 도시로, 대가족제가 핵가족제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천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 정보화하면서 전혀 새로운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농경사회와 달리 노인들의 경륜에서 오는 지혜의 필요성은 점차 줄어들게 됐다. 또한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면서 기성세대의 효용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노인층이 소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쌍둥이 간에도 세대차이가 난다는 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어지럽게 급변하는 사회에서 밀려드는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기조차 바쁜 터고 보면 기성세대들이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이 같은 사회변천과정에서 극도의 배금주의와 금전만능주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싹틀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세류가 우리 사회를 황폐화 시켰다고 할만하다. 남이야 어떻든 오직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을 짓밟고라도 남보다 앞서가고 잘 살아야겠다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극도의 이기적 개인주의가 극심한 경쟁심을 유발하고 사회분위기가 그만큼 각박해졌다는 느낌이다.
가정에서도 부모들이 극심한 경쟁 심리와 이기주의에 빠져있기는 마찬가지다. 자녀들이 버릇이 없고 예의가 바르지 않더라고 오직 공부만 잘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출세하는 게 제일의 효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학교 교육도 마찬가지다. 지식을 주고받는 데만 힘을 쏟을 뿐 인성교육은 할 겨를이 없다.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고 지식을 얻으면 되고 교사들은 보수를 받고 지식만 전수하면 그만이다. 바람직한 삶을 위해 올바른 도덕률을 심어주는데 최우선 순위를 둬야할 가정에서의 교육과 학교에서의 교육이 이렇다면 경로효친의 전통을 세워나가기 어렵다.

노인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데 대부분의 노인들이 일자리에서 물러나 역할을 상실한 채 비생산적 계층으로 살아간다면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많은 노인들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정에서 우대받지 못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아픈 몸을 이끌고 외롭게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선 행복한 삶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처지지만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부가 노인들을 위해 여러 가지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사회단체나 민간단체에서도 각종 행사를 벌이고 있지만 만족할 만큼의 행복한 삶을 안겨주기엔 부족하다.

가정에서 자식들에 의지하며 가족들과 어울려 대우받으며 사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같은 상황과 풍토를 바로잡아 나가려면 우선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금전만능의 이기적 개인주의보다

조홍상 <수필가, 언론인. 대전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실장 역임. 목요언론 편집위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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