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 등 견과류 ‘피를 맑게, 두뇌 회전에도 좋다’

올해는 무덥지 않았다. 지난해 그렇게 더웠을 땐 한 없이 원망스럽더니만 올해에는 제대로 ‘여름 값’도 못한 채 가을에 세월의 자리를 넘겨주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다. 그 중에서도 밤이며 호두, 잣 등 견과류의 계절이다. 견과류는 ‘피를 맑게 하는 음식’, ‘두뇌 회전 돕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고혈증, 심 혈관 계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잣이다.

잣나무는 소나무처럼 절개를 상징한다. 신라 제35대 경덕 왕 때 승려 충담사가 화랑 기파랑을 추모하며 쓴 10구체 향가 ‘찬기파랑가’에도 잣나무가 등장한다. 이 향가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한글학자 양주동 박사 해석을 인용하면 ‘열어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가는 것 아냐. 새파란 냇가에 기파랑의 모습 있구나.(중략) 아아 잣 가지 높아 서리모를 화랑이여.’ 충담사는 화랑 기파랑의 절개를 잣나무에 빗댔다.

잣은 잣나무 열매다. 솔방울 같은 단단한 껍데기를 벗기고 다시 안의 얇은 속껍질을 벗겨야 비로소 한 톨을 맛볼 수 있다. 귀한 씨앗이다. 그래서 ‘서민들은 구경도 못하고 신선이 먹는 음식’이라 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임금이 잠자리에 일어나자마자 초조반(初朝飯)이라 해서 아침 식사 이전에 죽이나 미음을 올리는데 잣죽이 많았다고 한다.(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음식 백가지-궁중음식-현암사)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잣을 제일로 쳤다. ‘본초강목’에도 ‘신라송자(新羅松子·신라의 잣나무 씨)’의 약효가 으뜸이라 했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당나라로 간 유학생들이 잣을 팔아 학비와 생활비로 썼다고 한다. 중국 진나라가 망했을 때 산속으로 도망간 궁녀들이 잣을 먹은 뒤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머리가 세지 않았다고도 한다.

잣은 호두와 같이 뇌기능을 활성화한다. 그러니 수험생이나 머리를 많이 쓰는 대덕연구단지 사람들에게 콩국수 대신 잣 국수를 한번 권해보거나 요리해보자. 콩은 삶지만 잣은 날 것을 사용해 요리방법도 간단하다. 다만 가격이 비싼 게 아쉬움이다. 예전에는 산에서 자라는 것만을 채집했으나 요즘은 재배하는 곳도 많아 가격은 조금 내린 편이나 여전히 비싸다. 국내산 가평 잣의 경우 100g당 7000원 선. 네 식구 잣 국수 한번 해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 잣 주산지인 경기도 가평 등지에는 잣 국수 전문점도 있다.

한번쯤 잣 국수를 아내에게 맡겨보자. 흔쾌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면 주방으로 직접 들어가자. 만드는 법도 간단하다.

<잣 국수 이렇게 만들어요>

재료 : 잣 100g(3/4컵) 오이 1개, 물 6컵, 소금 약간, 국수(밀가루 4컵, 물 1컵, 소금약간)
① 잣은 씻어서 믹서에 넣어 물을 붓고 곱게 갈아준다. 건더기가 남을 경우 또 한 차례 갈아준다.
② 오이는 얇게 채 썬다.
③ 밀가루는 소금을 넣고 반죽해 면포에 싸 두었다가 밀어서 0.3㎝너비로 얇게 국수를 만들어 놓는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칼국수나 일반 국수를 사용해도 된다.)
④ 국수는 삶아 찬물에 담가 물기를 제거한 뒤 잣 물을 붓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뒤 고명으로 잣과 채 썬 오이를 올리면 완성이다.

견과류 대사증후군 발병률을 7% 감소시켜 줘

견과류는 잣뿐만 아니다. 조만간 다가올 추석에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게 밤이다.

‘묵은 산채 삶아 내니 육미(肉味)와 바꿀 소냐. 귀 밝히는 약술이며 부스럼 삭는 생밤이라…’

정약용의 둘째아들 정학유(1786~1855)가 농부들이 매달 해야 할 일과 풍속 등을 한글로 지은 노래 ‘농가월령가’에서 나오는 대목이다. 비록 제철에 채취한 산채는 아니지만 건조시킨 나물과 밤은 고기의 맛과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하다는 표현이다. 견과류 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밤과 잣, 호도다. 우수성은 말이 필요 없다. ‘슈퍼 푸드(super food)’라고 말할 정도다.

견과류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10대 건강식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호두, 잣, 밤, 땅콩, 아몬드 등은 각종 영양소가 듬뿍 들어있어 건강식으로 오랜 사랑을 받았다. 견과류는 잎이나 뿌리에서 만들어진다. 흡수된 영양분이 종자 내의 저장기관에 모여서 발달한 부분을 식용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매주 약 한 줌(28g)의 견과류를 섭취할 경우 대사증후군 발병률을 7%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견과류 섭취량을 두 배로 늘릴 경우 대사증후군 발병 위험을 최대 14%까지 낮출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호두의 경우 오메가3가 신경전달이 원활하도록 돕는다. 비타민이 풍부해 뇌세포를 활발하게 해 줘 뇌 건강에 매우 좋다. 또 칼슘 함량이 높아 아이들에게 좋다. 또 혈액순환을 돕고 피부와 모발에 고른 영양소를 공급해 준다. 밤과 잣도 마찬가지다.

견과류에는 우리의 토종이외에도 아몬드, 캐슈너트, 헤이즐넛 등 외래종도 많다. 아몬드의 경우 불포화 지방산이 풍부해 콜레스테롤을 감소시켜 주고 성장기 어린이의 두뇌 발달이나 수험생의 집중력,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독특한 모양의 개큐너트는 맛과 식감이 좋고 단백질과 비타민B1 등의 영양가가 풍부하다. 개암나무 열매를 말하는 헤이즐넛에는 칼륨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우리 몸에 축적된 나트륨을 배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몸에 좋은 견과류를 매일매일 챙겨 먹기란 쉽지 않다. 종류별로 준비하기도 번거롭고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잊어버릴 때가 많다. 최근에는 견과류 하루 섭취량을 겨냥해 고안된 제품들이 많이 판매되고 있다. 견과류만 먹기에 입이 텁텁하다고 생각하는 소비자를 위해 크랜베리, 블루베리 등 상큼한 ‘건과’를 더해 포장하기도 한다.

집에서 약간 관심만 가지면 손쉽게 ‘의미 있는’ 견과류 먹을거리를 만들 수 있다. 바로 ‘밤 잣 호두 트리오 라떼’다. ‘라떼(Latte)’는 이탈리어로 우유를 뜻한다. 커피와 섞으면 ‘카페라테(coffee with latte)’가 된다. 요즘 동네 골목까지 들어선 커피전문점에 그럴듯한 이름의 ‘녹차라떼’, ‘고구마라떼’ 등은 해당 재료에 우유를 섞은 것뿐이다. 밤과 잣, 호두와 우유를 섞으면 ‘밤잣호두 트리오 라떼’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잣과 호두를 곱게 갈아 꿀에 재워둔 뒤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는 우리의 옛 조상들의 음료인 봉수 탕(鳳髓湯)에서 비롯됐다. 봉수 탕은 조선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에서 “독이 없고 먹으면 머리털이 검어지고 강장 효과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봉황처럼 오래살 수 있는 음료’라 해서 임금이 즐겨 마셨다. 빈혈에 효과적이고 폐에도 좋다고 한다. 봉수탕은 한국전통음식의 세계화 전략에 감초처럼 포함돼 왔다. 10분만 투자하면 가족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쌈밥에 사용되는 된장에 호두를 넣어보는 것도 이색적인 맛이다.

< 밤잣호두 트리오라떼 이렇게 만들어요>

재료 : 밤 잣 호두 우유 꿀(재료 모두 인원에 맞게 적당량)
① 밤은 찐 뒤 찻 숟가락으로 속을 긁어낸다.
② 잣은 고깔을 떼고 마른 천으로 표면을 닦는다. 호두는 속껍질을 벗긴다.
③ 블랜더(믹서기)에 삶은 밤과 손질한 잣, 호두와 우유를 넣고 곱게 갈면 완성이다.
TIP 호두껍질은 뜨거운 물에 5분쯤 담가 둔 뒤 이쑤시개를 이용하면 쉽게 벗겨진다.

이기진<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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