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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진짜 해방되었나?

미국 국회의사당 현관엔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지넷 랜킨의 동상이 있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한 다음날 대일선전포고 결의 안에서 388대1로 통과 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것은 랜킨 의원, 그는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제도’라며 들끓는 비난여론을 잠재웠다. 한나 아렌트란 사회학자는 ‘토론이 불가능하고 의문이 생겨도 집단의 통일을 깰까보아 전체의사에 따라가는 만장일치제도는 사람을 한 무리 개미들의 관계로 격하시킨다고 한다.

교황이 떠나는 18일 TV, 라디오의 중요뉴스엔 프란체스코 교황이 차지하고 신문도 마찬가지. 유력한 조간지 C일보1면 제목은 ‘희망의 손길로‧‧‧가장 낮은 곳은 보듬다’이며 지방지 K일보는 ‘살아있는 기도‧‧‧교황은 아프고 낮은 곳을 향했다’였다. 신문 방송이 마치 신탁 받은 선지자들처럼 프란체스코를 노래한다. 유사이래 이렇게 황홀한 찬양 기사는 드물었다. 만장일치였다. 한 줄의 섭섭한 기사가 없었다. 만장일치의 일사불란한 흐름이어서 가슴이 무거워진다.

유신통치시절 해방신학이 무엇이지? 종속이론이란 학설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침투를 무서워해 만든 것 아닌가?라며 궁금해 했다. 캄캄절벽 암흑시대였다. 그 시절 충남 대 총장으로 온 경제학자 박희범은 당시 활발히 움직이던 카농을 빗대어 공석 상에서 ‘50년대까지 풍요로웠던 라틴 아메리카가 지금 빈곤의 나락에 빠진 것은 가톨릭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해방신학이란 사상을 지향한다.’고 말해 종교계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해방신학은 공산주의에 가깝고 특히 해방신학의 중심 경제사상은 ‘종속이론’이며 이는 북반구 문명사회가 남반구 개발도상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켜 노예화 한다는 것이다. 사회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 카톨릭 교리서에는 사제가 직접 정치적이고 사회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정치구조나 사회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사 목자가 할 일 아니라고 규정하여 정의구현 사제단을 비판하기도 한다.

미국 대통령보다 더 화려하고 진실어린 환영을 받으며 한국에 온 프란체스코 교황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매우 복잡하다. 우선 기뻐해줘야 한다. 수많은 나라에서 유독 한국을 택해 한국의 발전을 격려해 주고 전 세계에 알려 자랑시킴으로서 간접적으로 가톨릭의 위상을 자랑할 것이다. 미군의 쓰레기장을 뒤지며 초콜릿과 빵을 주워 배고픔을 견뎌내던 그 거지같은 나라가 교황의 후광으로 빛나는 나라가 된 것을 전 세계에 알린다. 인증 샷 감이다.

그러나 한국에 온 프란체스코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대부답게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사람 곁으로 다가간다. 찢어져 피 흐르는 맨살의 세월 호 사건에 치료약을 뿌리며 치유를 기원한다. 핀셋으로 상처를 정리하며 ‘얼마나 아파?, 얼마나 쓰라려?’하며 위로한다. 희생자 유가족들이 항의 행진하며 끌고 온 나무 십자가를 교황청에 모신다고 한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신령하다.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사람 곁으로 다가가는 사람이다. 화려한 금 목걸이 대신 소박한 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전용식당 아닌 공용식당에서 환자가 아닌 대중과 함께 밥을 먹는다. ‘노숙자가 한명 죽었다면 뉴스가 안 되지만 주가가 10% 떨어졌다면 비극적 사실이 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마치 쓰레기처럼 버려 집니다’ 작년 6월 5일 그가 한 말씀이다. 노숙자가 죽으면 행려병자가 되어 나라 예산으로 화장하여 고이 모시는 문명국의 체제를 모르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한국에 온 프란체스코 교황은 자본이 밀어붙인 탐욕적인 용산 재개발 사업 때 죽은 5명의 참사 자, 군항시설 반대한 제주 강정마을 저항운동,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자들을 주목하고 있다. 자신을 우상화 하지 말라고 교황자신이 말했다면 특정 남의 나라 내정에서 모든 반대자들을 문제화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교황이 한국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세월호가 될 수도 잇고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연대를 호소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교황은 주교들에게 지시한다. 세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한다고 전제 사람들 앞에서 길을 제시하고 그들 안에서 화합시키고 그들 뒤에서 아무도 버림받지 않게 돌봐줘야 한다고 지시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착취와 노예, 그리고 다른 사회적 질병에 공모하는 셈이라고 가르친다. 침묵하는 것을 통해 행동하지 않는 것, 무관심을 통해 공모하는 것이라고 한다.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이 문득 생각난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경제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엣 대한 교회의 도덕적 반응에서 시작한 것이다. 15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통치 이후 독재정치 지속,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프란체스코 교황이 해방신학의 대부가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가난과 싸우며 가난한 사람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의 손을 잡고 그는 가고 있다.

해방신학은 이론상으로는 칼 마르크스를 일부 받아 드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고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에서 소외되어 비인간화된다. 부의 균등 분배 안 돼 인간적 삶을 살기 어렵다. 이런 현실 변혁은 프롤레타리아의 단결된 힘에 의한 혁명 이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의 이론 중 무신론만 빼고 전부 받아 드렸다.

보수적인 가톨릭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이 야당 느낌이 든다는 주위의 비판에 대해 프란체스코 교황은 ‘나는 공산주의 서적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한 번도 공산주의자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1968년 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는 빈곤한 국가가 부유한 국가에 종속되는 것은 세계적인 문제라고 선포한다. 국민을 사회 경제 정치의 불평등 부조리로부터 해방시키는 길은 사회참여에 적극 나서는 것이라고 결의했다. 로마교황청은 1984년부터 86년까지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사의의 연관성을 우려하는 경고문건을 발표했다. 이후 해방신학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는 사회개력으로 복음의 기쁨을 찾자는 아파레시다 문헌을 통해 빈곤한 사람 사회적 약자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하고 빈곤을 신의 뜻에서 어긋나는 사회적 죄악으로 보았다. 저명한 독일 신학자 불트만은 ‘교회에서의 삶은 고난당하는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잘못된 정치구조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갈파, 해방신학의 이론에 동조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은 과연 갈라파고스 적 외딴 섬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교황청의 1984년 경고문건대로 모범적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대답할 차례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 down)란 현 경제체제를 신성시하는 경제 권력층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의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낙수효과란 대 기업이 혹은 상류층의 부가 쌓이고 도가 넘으면 넘쳐흘러 중소기업 서민들이 덕을 본다는 이론으로 성장 후 분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지만 프란체스코는 낙수효과는 거의 입증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라며 낙수효과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프란체스코는 평화의 메시지를 발표하고 떠났다. ‘이민족의 유산은 오랜 세월 폭력과 박해와 전쟁의 시련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도 대낮의 열기와 한밤의 어둠은 정의와 평화의 일치를 향한 불멸의 희망을 잇는 아침의 고요함에 언제나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입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끝냈다. 한국은 프란체스코를 만장일치로 환영했고 만장일치로 그의 행동과 말과 축복에 갈채를 보내고 박수도 쳤다.

지금 한국에

   
 
서는 미아가 되어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젠 눈앞으로 다가온 해방신학의 거센 물결, 우리는 이 물결에 올라 탈 것인가? 혹은 물결은 헤치고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정상희<전 동아일보 제 2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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