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사별하고 2년여 동안 홀로 살아오던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혼자 살기 힘드니 새어머니를 맞겠다는 뜻을 밝혔다. 큰아들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적절한 새어머니를 찾아보았으나 선뜻 온다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은 새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아버지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드렸던 큰아들은 혼자 쓰기에도 부족할 텐데 두 분이 살림하기에는 더욱 쪼들릴 것이라는 생각과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큰 아들은 새어머니와는 비록 나이차는 얼마 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함께 사는 그 분을 어머니로 불렀다. 이에 형제들은 비위도 참 좋다며 놀리기도 했다.

새어머니 덕분에 아버지가 좀 편하게 지내신지 일 년 쯤 됐을 때다. 고향 마을에서 종전에는 없던 이상한 일이 가끔 생긴다는 소문이 큰아들 귀에 들어왔다. 마을에 널어둔 곡식이나 고추가 없어지더니 강아지도 없어졌다며 수군수군했다. 백년 이상 살아온 집성촌에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란다.

주민 대표들이 원인을 밝히기로 하고 유심히 마을 구석구석을 관찰했다. 그들에게 새어머니의 사소한 잘못이 눈에 띄었다. 이에 마을 어른들은 그동안 일어났던 불미스러웠던 모든 일들도 새어머니가 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토대로 집성촌 마을회의 끝에 새어머니를 배척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안타깝게도 새어머니는 떠나셨고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다시 홀아비가 되었다. 혼자 여섯 달을 버티던 아버지가 어느 날 큰아들을 불러 혼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소연하듯이 털어놓았다.

“네 새엄마가 온갖 밑바닥 장사는 다 하면서 거친 인생을 살아왔더라. 그러니 왜 욕심이 생기지 않았겠느냐? 그래도 집안 청소 깨끗이 하고 그간 내 밥은 잘 챙겨줬단다. 다시 데려오면 어떻겠느냐? 어르신들이 네 말은 귀 여겨 들으니 어떻게 방법 좀 찾아봐라.”

큰 아들은 생각 끝에 이런 저런 준비를 해 가지고 고향마을을 찾아갔다. 한곳에 모인 어르신들의 건강검진부터 해드렸다. 양주까지 맛보며 거나해진 어르신들은 “큰아들이 최고!”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들은 수건, 비누, 치약 등 준비해 간 선물도 나눠드렸다. 아들은 아버지를 잠시 자리에서 피하게 하고 본론을 꺼냈다.

그동안 일어났던 불미스러웠던 모든 일들도

새어머니가 한 것으로 추정했다

나 죽으면 절대로 고향산소에

묻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고...

“오늘 제가 여러 어르신에게 어려운 청을 하나 드리게 되었음을 먼저 용서해주십시오. 새어머니가 저희 집을 떠난 지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혼자 계시니 고향에 올 때마다 집 안팎 곳곳이 도저히 못 볼 정도로 엉망입니다. 고민 고민하다 아버지께 여쭸습니다. 제가 어르신들에게 부탁드려보겠으니 싫지 않으시면 아무 말 마십시오.”

아들의 말은 이어졌다.

“새어머니를 다시 모셔오면 어떨까요? 아무 대꾸 없으신 걸 보니 아버지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 앞으로 동네에서 도난사건이 일어나면 모든 책임을 제가 지겠습니다. 저를 보시고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장내에 한동안 침묵이 흐른 잠시 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아무개 박사(큰아들)가 이리도 간청하니 어쩔 수가 없구먼.” 이에 다른 분들도 동조했다. “그래, 그래, 아들 효성이 지극하니 한번 봐 주세.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돼! 알았지?”

곡절 끝에 아버지는 다시 홀아비 신세를 면하셨다. 돌아온 어머니께도 다시는 오해 살 일이 없도록 조심스레 행동하기를 바라는 말씀을 드렸다. 대신 매달 생활비를 조금씩 더 보내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이후 어머니에게 신경을 더 많이 써드리고 어머니, 어머니라고 불러드렸다. 막내동생 부부도 잘 해드리기 시작했다. 생활이 안정되어 가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정식부인으로 맞이하고 혼인신고도 했다.

두 분이 오순도순 평화롭게 지내셨을 무렵 어머니가 심장병을 얻었다. 약물치료로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해 심장판막 교체수술을 했다. 그 후 판막을 꿰맨 실이 터져 즉시 제2차 수술을 했고, 2년이 지나 한 번 더 세 번째 수술을 권유받게 되어 입원을 계속하며 치료를 했다.

세 번 째 수술을 놓고 집안 식구들의 의견을 모으는 중에 얼마 후 퇴원을 해도 된다는 주치의의 판정이 났다. 큰아들은 집으로 모시고자 했으나 어머니는 “바로 시골집으로 데려다 달라”며 거부했다.

어머니를 집 안방에 모시고 병원에서 얻어간 반찬과 된장국으로 차린 조촐한 밥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때 어머니는 “아들, 참 고생 많았어. 고마워. 여태껏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아무개 가문에 들어와서야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다운 대접을 받다니...”라며 눈물 반 웃음 반이 됐다.

귀가 요양을 하며 병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받아오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 손을 잡고는 쳐다보았다.

“나 죽으면 절대로 고향산소에 묻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고 수의도 입히지 말고 준비해 놓은 한복을 그냥 입혀 화장해서 화장 터 뒷산 나무 밑에 뿌리고, 통장과 인감도장은 일러준 곳에 있으니 아들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어머니가 고향으로 내려가신 지 얼마 후 큰아들에게 부음이 전해졌다.

박천규(본 클럽 고문 / 전 대전MBC 상무)

*의학박사인 큰아들은 국립대학병원장을 했던 의료인이며 이 이야기는 실화다.

박천규  mogyoclu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