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도 많으면 병이 된다

“다정도 병 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후기 문신 이조년(李兆年)의 시(詩) 다정가(多情歌) 한 구절이다. 정(情)도 많으면 병이 된다는 교훈이다. 어찌 정 뿐일까. 요즘세상 많아서 병 되는 것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아파트까지 넘쳐난다. 심지어는 민주주의도 넘쳐나 6․25남침전쟁 주범단체들까지 득세하고 있다.

등 따습고 배부른 지가 불과 얼마 됐다고, 그토록 그립던 풍요가 이젠 병폐로 전락하고 있으니, 부침하는 흥망성쇠가 무상하다. 벌써 11월이다. 하늘빛도 예대로 청명하고, 바람결도 그때처럼 싸늘해졌다. 부침하는 인간의 역사 아랑곳없이 세월은 ‘곧이곧대로’ 계절 따라 변함이 없다. 산하가 단풍으로 물들어 민생은 또 한해의 겨우살이 걱정으로 무거워지고 있는데도, 배부른 정치권은 아랑곳없이 물고 뜯기 정쟁으로 이전투구다.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겼던 외침 수난역사도, 남북으로 국토가 분단된 약소민족의 서러운 역사도, 또 동족상잔의 처참한 6․25남침 전쟁역사도 알고 보면 모두가 많은 욕심 때문에 빚어진 정치지도자들의 죄악이다. 사회악의 축이 되는 것이 바로 정치집단들의 무량한 권력욕심 경쟁에서 비롯된다. 개인도 단체도 마찬가지다. 욕심은 반드시 이해타산에 어울려 시기와 질투, 음흉한 계략과 모함이 합세하여 섬뜩한 칼춤까지 추어대기 예사다.

수조원대가 넘는 부정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문은…

위선을 진실처럼 매도하고, 부정을 공정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예부터 현인들은 “마음을 비우라”고 가르쳤다. 욕심을 다스리는 교훈이었다. 요즘 풍요를 떠들지만, 세태는 오히려 각박해졌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외형조건으로 보아 행복의 조건은 부족한 게 없지만, 막상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행복불감증이 확산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많아진 욕심 때문이다. 권력, 재물, 명예 모두가 내 몫이어야 식성이 풀린다.

누구라도 욕심은 선의(善意)가 없다. 한동안 세간의 화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정한 비자금 문제가 이제는 결말이 났다. 그러나 수조원대가 넘는 거액의 부정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어느 전직 대통령의 소문은 인터넷을 타고 떠 돈지 오래됐어도 어찌된 일인지 언론도 사정당국도 무관심하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 추궁에는 적극적인 야당이 NLL포기관련 기록문서 증발사건을 밝히는 데는 미온적이다.

밝혀져야 이로울 게 없다는 계산 때문일 것이다. 정상회담을 빌미로 당시 대통령이 서해국방한계선(NLL) 포기를 거론한 게 사실이라면 결과를 떠나 발상만으로도 범죄다.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NLL선은 젊은이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전선이다. 누가 누구에게 양보하고 포기한단 말인가. 사건의 경중으로 따져 국정원 대선개입의문 국정조사에 앞서, NLL관련 사초 조작증발사건 국정조사가 더 우선이어야 한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 때 ‘야권단일화’ 명분을 내세워 골수좌파들을 국정단상으로 등극시킨 정당이 민주당임은 누구도 다 안다.

툭하면 TV가 비추는 국회광경을 본다. 청문회도 그렇고, 국정조사도 그렇다. 고자세 군림하는 국회의원들이나, 또 증인석에 앉아 머리 조아려대는 피 조사자들의 비굴함이 똑같이 역겹다. 국회의원들 상당수가 실정법을 위반한 전과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청문위원이고 국정감사의원들이다. 누가 누구에게 도덕성, 위법성을 따지고, 비판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부터 기강이 무너졌다.

제2의 이석기, 제3의 이석기는 없는지…

많아서 발생하는 병폐현상은 선거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적임자는 오직 나뿐”이라고 설쳐대는 자칭 양심과 능력의 소유자들뿐이다. 며칠 전 끝난 10․30재보선도 마찬가지다. 개중에는 가래침 밭아 하수구에 쳐 박아야 될 이름들도 있다. 국가의 정체성마저 짓밟는 불온집단의 허구적 이념춤판까지 가세하면, 세상은 금방 평화와 행복이 넘쳐나는 태평천국이라도 되는 듯싶다. 부정을 정의처럼 위장하고 나서는 집단들이나, 음흉한 집단이 많아지면서 공정(公正)과 법치(法治)까지 비틀대고 있다.

최근 지역마다 언론기관이 많아지고 있음은 사회적 부패현상이 그만큼 많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또 불가도, 교회도 많아지고, 자비와 사랑을 외쳐대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자비도 메마르고 사랑도 고갈되고 있으니 이 또한 많아서 생기는 병폐가 아닌가.

류인석(본 클럽 회원 / 전 경향신문중부본부장)
 

류인석  mo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