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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의거 61주년에···

오늘은 3·8민주의거가 일어난 지 61주년이 되는 날이다.

61년 전인 1960년 우리의 현실은 어떠했는가?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고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정부가 건국한 지 2년 만에 북한 김일성의 무모한 남침으로 조국의 강산은 3년 동안 피로 물들었고 수백만의 군인과 양민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부상을 당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이산가족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암울한 시기에 정치현실은 독선과 독재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백성들의 삶은 가난과 궁핍으로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집권 자유당은 장기 집권을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등 그들이 야욕을 노골화하는 상황이었다.

급기야는 제 4대 대통령과 제 5대 부통령 선거에서 연로한 이승만대통령의 후임으로 이기붕 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 공작으로 온 나라가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불법적이고 부정한 정치권력에 대해 일부 야당을 제외하곤 많은 국민들은 정권의 탄압과 강압에 못 이겨 숨을 죽이고 있었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불만과 불평이 가득 차 있었지만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태여서 이렇다 할 항거나 항의를 제대로 표출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건국이후 최초로 민주적인 교육을 받았던 당시 고등학생들은 이 같은 당국의 감시나 탄압에 비교적 자유로웠고 부정과 부패 그리고 특히 부정선거에는 당연히 항거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배운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세대였다.

결국 최초의 불꽃이 대구에서 피어올랐다.

1960년 2월 28일 그날은 일요일로 야당의 유세가 열리는 날이었지만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당국의 지시로 일요 등교를 강행하자 학생들이 크게 반발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름하여 2·28 대구민주의거다.

그 후 며칠 조용하다 드디어 3월 8일에 대전의 고등학생들이 횃불을 높이 들었다.

당초 대전의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동으로 야당의 유세가 있을 대전공설운동장을 향해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시위를 계획했으나 관계당국에 사전에 계획이 누출되면서 당일 대전고등학교 1,000여명의 학생만이 교문을 박차고 담장을 뛰어넘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어서 3월 10일에는 대전상고생 600여명도 시내로 진출했으니 이른바 3·8민주의거다.

이처럼 민주, 자유, 정의의 기치아래 불꽃은 훨훨 타올랐고 이어서 3·15마산 등 시위의 물결은 전국으로 번지면서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민주역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를 좁게 이야기해서 대전고등학교 100년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고 커다란 의미를 갖는 쾌거임이 틀림없다하겠다.

개교 이래 대전상고 역사에서도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감히 규정짓고자 한다.

20세기가 열리기 전만해도 대전을 대전천 등 몇 개 하천이 흐르는 넓은 들, 이른바 한밭, 한가한 농촌지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하면서 경부와 호남등 철길이 놓이면서 대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으면서 영남과 호남 경기를 연결하면서 교통의 요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물론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크게 힘 얻은바 있지만.

대전에서도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운동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면서 독립을 위한 조선민중의 만세운동은 등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대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동장터를 중심으로 백성들이 목이 터져라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경찰은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진압했다.

그 이후에는 별다른 저항운동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로부터 40여 년 후에 그 후손들인 학생이 중심이 돼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으니 그 규모는 대전고 1,000여명, 대전상고 600여명 등 1,600여명이었으니 그 규모가 엄청나다 하겠다.

짐작컨대 당시 대전공고, 보문고, 대전여고, 서여고 등이 동시에 참여했다면 그 규모는 어마어마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4·19는 보다 빨리 일어나 자유당 정권의 몰락이 한발 앞당겨 질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튼 3·8의거는 20세기뿐만이 아니고 유사 이래 그때까지 대전에서 가장 대규모로 특히 순수한 학생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생각하고 대전 100년사에 자랑스럽고 위대한 역사로 기록돼야한다고 감히 주장하고자 한다.

코로나19는 우리의 모든 일상을 빼앗아갔고 이전과 이후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만남은 사라지고 언텍트가 대세가 되어버렸으니.

이 팬데믹 때문에 의거 60주년인 지난해에는 대대적인 기념식과 각종 이벤트가 취소되고 단지 3·8의거로 표지판과 진원지 표지판 제막식만이 조촐하게 거행됐다.

아쉬움이 남는 해였다.

금년에도 코로나는 잦아들지 않아 기념식은 시청남문광장에서 참석인원이 100명 이내로 한정돼 소규모로 거행된다.

우리의 숙원사업인 3·8기념관은 이제 부지를 확정하고 설계를 거쳐 착공하게 되며 오는 2024년 3월 8일 준공을 목표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무려 의거 61년, 기념사업회 발족 21년 만의 쾌거라 하겠다.

제때 예산이 확보돼 차질 없이 진척되기를 기원해 본다.

기념사업회가 뒤늦게 출발하다보니 당시의 사건 등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다.

회원은 물론 시민들께서도 당시의 자료와 기념될만한 물건 예를 들어 교모, 교복, 뱃지, 가방, 교과서, 일기장 등을 확보하거나 보관하고 있다면 기념사업회에 기증해 줄 것을 당부드린다.

김영광 전 대전MBC 보도국장

모두가 훌륭한 역사적 사료이니까.

회원여러분과 시·도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를 부탁해 본다.

2021. 3·8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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