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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정취에 젖어본 하루

충남 서산지역 일대를 돌아보고 왔다.

아주 오래전에 서산지방을 지나며 잠깐씩 돌아보긴 했지만 작정하고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인가 전에 봤던 기억은 전혀 나지 않고 모든 게 생소하기만 느껴졌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읍성의 하나로 가장 완벽한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성곽이다.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어 사적 116호로 지정돼있다.

해미는 예부터 바닷길을 이용해 각처의 물자를 수송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고려 때는 중국의 송나라 요나라 사신들이 우리나라를 드나드는 관문이었다고 한다. 해미에는 왕래하는 사신 일행을 맞고 배웅하며 이들의 편안하고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안흥정이 있었으며 아직도 그때의 안흥정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닷길로 접근이 쉬워지자 서산 해미지역엔 왜구의 침몰이 잦아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후기 169년간 전국에 걸쳐 왜구의 침입이 무려 519회나 있었다니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서해 연안으로 침입한 이들은 내륙 깊숙이 들어와 특히 충남·경남지역에서 주민을 마구 죽이고 가축이나 곡식 등을 약탈해 갔다고 한다.

왜구의 잦은 침몰로 피해가 커지자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충청 병영을 해미로 옮겼다고 한다. 해안과 가까이 있는 해미가 왜구의 침입에 신속히 대응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춘 곳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이후 해미에 위치한 충청 병명엔 병마절도사가 배치돼 육군을 지휘했으며 해미읍성은 서해안 일대의 고을들을 지키는 수호처구실을 하게 됐다고 한다.

해미읍성은 1417년에 성을 쌓기 시작 4년만인 1421년 세종 3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성은 산성이었으나 해미읍성은 평지에 쌓은 성으로 성 내벽을 만들고 여기에 의지해 다듬돌로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성주위엔 도랑을 파서 적의 접근을 어렵게 하고 평상시엔 다리를 놓아 통행했을 것으로 추청하고 있다. 또 성벽 바로 밑엔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어 역시 접근을 어렵게 해 탱자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또 특이한 것은 일정 구간 성돌에 공주, 청주, 충주, 인천, 서천, 부여등 지명을 새겨넣어 각 지방민이 성을 나누어 쌓으면서 책임을 지워 부실공사를 막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읍성 안에는 여러 채의 건물과 기념물 등 각종 시설이 자리 잡고 있어 옛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성을 드나드는 3개의 문 가운데 남쪽으로 통하는 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은 1491년에 중수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500여년 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미읍성 안에는 수령이 행정업무를 보는 중심건물인 동헌(東軒)에 공무를 수행하는 외아와 수령의 가족이 사는 내아가 있다. 또한 중앙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객사, 병사들이 휴식을 하고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히고 문객. 묵객들이 시를 짓고 글을 쓰는 청허정(淸虛亭), 천주교 신자등 국사범을 수감하던 옥사가 있다. 이 밖에도 말단관리, 농부, 상인의 집을 재현해놓은 민속가옥 등이 있다. 당시 성내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비롯 수백 명의 군사와 노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해미읍성은 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전래되자 1970년 정조 때부터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 이때 내포지망 13개구현의 천주교도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을 했으며 당시 실학인 다산 정약용이 해미읍성으로 귀향을 와 열흘간 있기도 했다고 한다. 1966년엔 대원군이 천주교도를 탄압, 학살하면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해미읍성엔 선조 112년(1579년)에 이순신이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했으며 이때 이순신은 부정한 일이 있으면 바로 잡는 청렴, 강직한 자세를 보여줬다고 한다.

호서 좌영이 들어서게 됬으며 여기에 소속된 고을은 예산 온양 당진등 13개 군현으로 4천명의 병사가 있었다고 한다. 중앙에서 파견된 조선조 효종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해안지역보다 내륙의 방어가 더 중요하다는 필요에서 효율적인 대처를 위해 1652년 해미읍성의 충청병영을 청주로 이전하게 됐다. 이때 해미읍성엔 대신 호서좌영장이 해미현감을 겸직하면서 평상시에는 행정중심지로 비상시엔 방어기지 노릇을 했다고 한다. 내륙방어와 함께 서해안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줬다.

일제 강점기 이후 동학농민운동을 겪은 일제는 우리나라에 성벽이 남아있으면 이를 의지해 항거할 마음이 생긴다는 구실로 1910년 읍성철거령을 내려 이때 전국의 읍성과 산성 대부분이 철거됐다. 그러나 해미읍성은 헐리지 않고 대부분의 성곽이 잘 보전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성안에 있던 건물은 해미면사무도와 학교 등으로 쓰이고 일부는 철거됐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 해미읍성은 정비와 복원을 위한 발굴이 시작됐다. 민가와 학교를 성 밖으로 옮기면서 학교운동장등에서 중요한 건물지와 유물들이 발굴됐다. 여기서 발굴된 유적과 출토

된 기와, 백자, 분청사기등 수천 점의 유물들로 해미읍성의 역사는 물론 당시의 식생활, 습관, 유행등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게 됐다.

2000년 이후 매년 가을이면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가 열려 당시 읍성의 역사와 생활상을 재현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600년 전으로 돌아가 역사적 고증을 통한 충청병마절도사 출정식과 함께 조선시대 운동회, 민속공연, 전통국악공연, 마당극공연 등이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돼 전국적인 축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옛 정취에 젖어 해미읍성의 역사성을 음미하며 해미읍성을 돌아본 우리 일행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을 둘러본 후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삼존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중 가장 뛰어난 백제후기 작품으로 중앙에 현세불을 의미하는 석가여래입상, 우측에 과거불을 의미하는 제화갈라보살입상, 좌측에 미래불을 의미하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돼 있다. 삼존상 모두 자애로운 미소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얼굴모습에서 신비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식사후엔 조선 초기 세종 때의 대표적 산수화가인 안견선생의 작품을 전시해놓은 안견기념관을 둘러봤다. 세계적걸작품이란 몽유도원도는 아쉽게도 원본은 일본에 있고 이곳엔 영인본과 모사본이 중점 전시돼 있었다.

다음엔 1694년 최초로 건립됐다는 송곡서원을 돌아봤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됐다 1910년 유림에 의해 복원됐다고 한다. 서원으로 가는 입구 길 양쪽에 수령 550년된 두구루의 향나무가 마주보고 서 있는데 음양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또 별자리를 표시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제작한 금헌 류방택선생의 과학정신을 기리며 우주과학의 체험중심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도 돌아봤다. 이 천문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현재 국보 제28호로 지정돼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과학관에선 망원경으로 천체를 직접 관측하고 입체영상과 함께 가상의 별자리를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다.

끝으로 울창한 수목들과 어우러져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부석사를 돌러보고 빽빽한 하루 일정의 문학탐방을 마치고 귀전 길에 올랐다.

조홍상 전 대전일보 이사 ‧ 목요언론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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