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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영혼지배, 신사(神社)전재홍 사진이야기➃

일제는 1907년 소제산에 대전 처음으로 신사를 조성했다. 대전신사 초입 한쌍의 석등과 도리(鳥居).

신사(神社)는 일본인들이 특정 신위를 모셔놓고 복을 비는 민간신앙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천왕제가 확립되고 신도(神道)가 국가종교로 발전해, 신사는 일본 국가제례의 상징공간이 되었다.

일제가 남산에 조성한 조선신궁 입구의 석등과 제1도리(鳥居).

대전이 근대기의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의 역 개설이 결정됨에 따라 1904년을 전후해 많은 일본인들이 대전역 인근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후 경부선이 개통되며 주변 도시는 물론, 타 도시에서의 인구유입도 많아져 신흥도시의 면모를 갖춰갔다.

경부선 개통 이전부터 대전에 많은 일본인들이 정착을 하며 상권을 장악했다. 당시 춘일정(春日町)으로 불리던 거리는 일식 건물로 빼곡이 차 있다.

일본인들의 정착이 늘어남에 따라 대전 첫 신사(神社)가 1907년 4월초 소제산(蘇堤山)에 세워졌다. 대전대신궁(大神宮)으로 불린 신사는 10년 뒤 법규에 의해 공인 신사가 되고 호칭을 대전신사로 바꾼다.

 강점기 소제호를 찍은 사진으로 제작한 엽서.

첫 대전신사가 위치한 소제호 주변은 조선 성리학의 거목 송시열이 학문을 연마하던 송자고택과 전통가옥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기록이 전하는 소제호의 크기는 둘레 8.7km, 동서 2.9km, 남북 2.8km로 회덕군에서 가장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

소제산에 위치한 신사는 접근성에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다. 1926년 5.22일자 신문에 의하면 ‘대전신사의 위치가 철도에서 밭으로 끊어진 곳에 위치해 다니기가 어렵다. 또한 경내가 사유지로 여러 가지 불편하다.’

 

대전중학교 원경과 근경.

 

 대전헌병대. 왼쪽 정문에 병사상담소라고 써있다.

이러한 일본인거류민회의 현안을 대전 양조업계의 큰손 쓰지 긴노스케(辻謹之助)가 자신의 토지 만평을 기부하며 해결해 준다. 위치는 당시 대전중학교와 헌병대 중간의 송림언덕 지역이다. 신사부지 1만평을 희사한 쓰지 긴노스케는 24살 되던 1904년 대전에 정착하며 잡화상 시작해 재력을 모아나갔고, 1907년에는 동척대전지점 뒤에 후지추(富士忠)양조공장을 개업했다.

아래 지붕이 후지추(富士忠)양조공장. 2층 건물은 동양척식 대전지점.

대전 원동 옛 동양척식(주)지점. 2000년대에 촬영된 필자의 사진.

그는 사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아들 만타로(萬太郞)를 오사카고등공업 양조과에 입학시겼다. 전성기의 후지추양조는 1년에 5천석의 간장을 만들고 왜된장(味噌) 20만관, 누룩(麯子) 35만개, 약주 1천5백석을 제조했다. 종업원은 150여명이었고 박람회, 품평회 등에서 호평을 받았다.

소제산에서 대흥동으로 이전을 하며 신축된 대전신사. 사진에 나오는 2명의 인물 중 하나는 후지타(藤田健治郞) 주임사장(主任社掌)일수도 있다.

소제공원에 있던 대전신사는 지금의 성모여고자리로 옮겨 신축, 20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929년 10월 준공되었다. 당시 대전신사를 총괄하는 주임사장(主任社掌)은 후지타(藤田健治郞)였다. 1906년 8월 한국에 왔고 1919년 충청남도 대전신사사장을 임명받았다. 1915년에는 대전소학교부지 3백20평을 기부했는데 그 공으로 조선총독부 상훈국으로부터 은배(銀杯)를 하사받았다.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서며 의무적 신사참배 훈령을 공포했다. 전쟁의 광기는 더욱 심해져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강제적, 강압적 신사참배는 더욱 심화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로 단종을 당한 장기진씨. 그는 노동에 동원되어 파상풍과 동상으로 두발, 두손을 잃었다. 2005년 필자 촬영

광복이 되며 전국 대부분의 신사가 파괴되었으나 소록도신사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다. 한센인들은 질병치료와 먹고사는 문제가 더 시급했을 것이다.

이러한 반감으로 일제가 패망한 8월 15과 16일 양일간에 전국의 많은 신사들이 방화ㆍ파괴되었다. 1945년 6월 통계를 보면 전국에 신궁2개, 신사 77개, 면단위의 소규모 신사 1062개가 세워졌다. 위 통계를 근거로 유추하면 광복 초기, 전국에서 1천 여 개의 신사가 방화ㆍ파괴된 것이다. 식민지배를 잊지 않기 위해 내륙에 몇 개의 신사가 현존해, 역사의 거울로 삼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조선총독부 건물 또한 그렇고......

호남평야를 헐값에 매수하고 농장을 경영했던 호소카와농장 지역에 건축된 대장신사. 현재 익산시 춘포면.

 

부산 용두산신사 본전. 일본인들은 개항 이전부터 부산에 들어와 왜관에 신사를 설치했다.

 평양 대신궁 신사.

사진출처: 대전광역시, 문체부문화데이터광장, 전재홍촬영 사진.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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