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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 벌채와 조선의 지물상 박흥식전재홍 사진이야기②
신갈파진 목재회사에서 출발하는 뗏목. 압록강 상류나 개마고원에서 벌채되는 원목을 떼로 엮어 하류인 중강진ㆍ만포ㆍ신의주로 떠내려 보내는 중계항 기능을 하였다

영림창(營林廠)은 일제기인 1907년 중국과 경계인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삼림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국경지역의 원목을 벌채하기 위함이었다. 영림창 설립 당시 창장(廠長)은 목재창장이 겸임하였기에 본부를 중국 안동현 목재창 내에 두었고, 1908년 10월 신의주로 이전했다.

신의주 영림창. 창장 1인에 사무관 5인, 기사 여러 명, 주사 5인의 조직이었다. 사무관은 함경북도관찰사나 평안북도관찰사가 겸임하기도 할 정도로 영림창은 고위 지방관이었다

영림창은 혜산진에 지청(支廠)을 열고, 신갈파진·중강진·고산진·회령·청진에도 출장소를 두었다. 무산군 연암(延岩)에는 파출소를 두어 벌목과 뗏목의 감시 또는 목재공급의 일을 관장케 하였다.

1909년까지 벌목된 목재는 압록강에서 배 30만 척 분량, 두만강 10만 척 분량이었다. 벌목된 목재는 원목료를 내고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었다. 일본은 벌목을 위해 신갈파진과 중강진, 고산진에 일인 이민을 장려했고 벌목한 목재를 운반하는 뗏목타기도 권했다.

압록강 유역에서 벌채한 원목을 엮어 만든 뗏목에 오른 벌목공이 거대한 바위를 피해 위험스럽게 내려가고 있다
거센 물살을 따라 압록강 하류에 도착한 원목들. 인부들이 원목을 강안으로 옮기고 멀리 돛단배가 두둥실 떠있다
중국인 벌목공들이 뗏목의 노를 저으며 이동하고 있다. 배경은 압록강 철교

이렇듯 일본인 이민과 더불어 일본의 거대 자본은 목재 자원수탈을 위해 압록강변에 공장을 설립한다. 일본 미쓰이(三井)재벌 계열의 왕자제지는 1873년 설립된 일본의 거대 제지회사로 신의주부 마전동 385에 조선분사를 세웠다.

1931년 당시 자본금은 6천590만원이었고 종이류 제조 판매와 목재매매, 전기공급, 광업, 운송업등 돈이 되는 사업은 다 했다. 일본 본사 사장은 후지와라(藤原銀次郞)였고 조선분사 공장장은 무타(牟田吉之助)였다. 무타는 1913년 설립된 신의주전기(주) 주식 4000주 중 795주를 소유한 최대 주주였다.

왕자제지(주)조선분사. 거대한 제지 설비공장에 5명의 직원이 서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무분별한 벌채로 조선의 산은 민둥산으로 변한다
종로의 화신백화점. 오른쪽의 동아백화점을 인수해 통로로 육교를 설치한다. 일본 백화점과의 경쟁에서 이기며 조선인이 경영하는 최대의 백화점으로 우뚝 선다

 

화신그룹 총수 박흥식

일제강점기 민족기업인 화신그룹 총수 박흥식이 일본의 거대기업 왕자제지와 일전을 치른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박흥식은 평남 용강군 옥도리에서 박제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10여대 째 내려오는 2천석 지주였다.

 그의 형 창식은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민족학교인 대성학교에 다녔는데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모진고문을 당했다. 그 여파로 풀려난 지 1달 만에 사망해 어린 시절부터 일제에 큰 반감을 품게 된다.

1926년 서울에 와 선일지물을 설립하는데 시기적으로 대운이 따른다. 신교육이 늘어나며 연필과 만년필의 필기구가 등장해 서양 종이를 써야만 했다. 전국에 일면일교(一面一敎) 정책에 의해 학생 수가 급증했고 교과서 수요 또한 폭발적으로 늘었다.

총독부의 토지조사가 시작되어 수 백 만장의 지적도와 토지대장이 만들어 졌다. 거기에 증권과 지폐의 발행이 늘며 종이의 수요가 급증했다.

박흥식은 종이소매상과 조선인 인쇄업자, 문방업자 수십 명과 손을 잡아 매출을 늘려갔다. 이에 일본인 도매상인들이 견제를 하며 종이를 싹쓸이 해버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27년 일본의 왕자제지를 찾아갔으나 실무자가 만나주지를 않았다.

스웨덴에 세계적인 제지공장이 있다는 정보를 얻어, 화물선 가득 종이를 수입한다. 이는 왕자제지와 일전을 불사하는 일생 일대의 큰 모험이었다. 일본인 지물상과 관공서, 회사, 은행들이 구입을 꺼려했으나, 민족감정이 고조되며 판매가 늘기 시작했다.

먼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박흥식의 종이로 인쇄했다. 이어 일본인 신문인 경성일보와 친일신문인 매일신보도 자청해 구입했다. 왕자제지와의 일전에서 승리하며 박흥식은 1932년을 고비로 조선 제일의 지물상이 된다.

일제강점기 무자비한 벌목으로 인해 조선의 산야는 민둥산이 되고 피폐되어갔다. 그나마 조선 지물계의 큰 손 박흥식이 왕자제지와의 한판에서 승리함으로써 민족 자존심을 지켰다고 하겠다.

화신연쇄점. 박흥식은 전국에 휘날리는 화신 깃발을 보고 싶었다.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이 화신에 입사하며 박흥식에게 연쇄점 운영을 건의했다. 그래서 실행된 연쇄점 모집에 전국에서 3천여 점포가 신청했다
화신백화점 포스터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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